저자 전창림 | 어바웃어북 | 2013.02.28
▣ 빛과 색의 조화로 그림에 이야기를 담다.
베르메르는 거의 200년간이나 잊혀진 화가였다. 19세기 이후에야 그에 대한 재조명이 있었고, 그의 그림 모작이 나와 경매장에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다.
빛과 색을 해석하고 표현하는데 베르메르보다 더 훌륭한 화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색채 표현은 뛰어나다. 그느 당시의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색감이 강렬하고 빛을 잘 이용하였다. 대상물에 비치는 햇빛의 해석은 거의 200년 뒤의
인상파 화가들과도 견줄 만하다. 그는 늘 빛이 대상에 비쳤을 때 표면에 생기는 빛의 효과를 탐구했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의 그림을 보면 물감에 진주 가루를 갈아서 섞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묘사력이 매우 뛰어나서 초점이 없는 사진같이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매우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화가의 아틀리에>를 보면 벽에 걸린 지도의 굴곡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적인 기법에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사진기계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 그의 그림들에는 이러한 징후가 여럿 보인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 등장하는 소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자. 입술이 유난히 붉어서 연지를 바른 듯한데 윤곽이 조금 번져 있어서 더욱 탐미적으로 보인다. 개인초상화에서 입술을 반쯤 벌린 예는 거의 없다. 영화에서는 그 때문에 베르메르의 아내가 그림이 음란하다고 소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미술사가들은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대부분 이야기가 없다고 말한다. 인물들은 같은 장소에서 인형처럼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좀 특별한 매력이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화학자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만한 '진사'라는 원광에서 얻은 버밀리온, 청금석에서 얻은 울트라마린 등의 안료와 그 원료들을 처리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베르메르는 노란색과 파란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특히 노란
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여인을 그린 인물화 가운데 열여덟 점에서 모델들이 노란색을 입고 있을 정도이다. 베르메르의 또 다른 대표작 <우유를 따르는 여인>도 그가 좋아하는 노란색 윗도리와 파란색 치마를 입혔는데 그 색감은 정말 놀랍다.
영화에서 베르메르가 후원자 반 라위번의 아내를 그린 그림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을 완성하여 공개하는 자리에서 반 라위번이 베르메르에게 아내의 옷을'인디언 옐로'로 칠했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베르메르가 그렇다고 하자, 반 라위번이 인디언 옐로는 망고잎만 먹는 소의 오줌으로 만든 색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딱 맞는 색을 칠한 셈이라고 농담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작가는 인디언 옐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인디언 옐로는 인도에서 15세기쯤 발견되었으나 유럽 화가들이 이 색을 사용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인디언 옐로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786년 아마추어 화가 드허스트 Roger Dewhurst의 편지에서다. 더구나 유화에 쓰인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인 1830년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까 베르메르가 활약하던 1660년경에는 이런 안료가 유럽에 있을리 없다.
영화에서 단지 재미있는 대사를 위해 그런 설정을 한 것 같은데, 시나리오 작가에게 이런 전문적인 고증을 기대하는 건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년을 준비했다는 원작소설에서도 이런 오류가 나온다. 소설에서는 노란색으로 마시코트(massicot)를 썼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 마시코트도 1841년에 발견된 광물성 안료이다. 베르메르가 썼던 노란색은 납과 주석으로 된 노랑이었을 것이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빛의 효과에 대한 해석에서 인상파에서야 나타나는 현대성이보인다. 그러나 인상파처럼 튀지 않고 매우 안정적이다. 엄격하게 사실적이며 생명이살아 있는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정지해 있는 듯하다.
유혹적인 여인을 묘사하는 말로 '팜므 파탈'(femme fatal)이란 말이 있다. '치명적인 여인'이란 뜻으로, 관계가 엮이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지만 너무나 유혹적이라서 피할 수 없는 여인을 말한다. 베르메르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고 얼굴만으로도 이 소녀를 팜므 파탈로 그려냈다. 소녀는 반쯤 벌린입술 사이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도 하고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듯도 하다.......p202~205
베르메르, <화가의 아틀리에>, 1666~67년경, 캔버스에 유채, 120x100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 박물관
베르메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66년경, 캔버스에 유채, 74.5x39cm, 네덜란드 헤이그 미술관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여인>, 1658~6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4x41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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