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채사장 | 웨일북(whalebooks) | 2017.12.24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죽음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노화에 대하여
자기 관리를 못하는 나는 벌써부터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데, 중년을 넘긴 지혜로운 분께서 앞으로는 고장 나는 부분을 고쳐가며 살아야 할 것이라고, 이제 여기저기 아픈 곳이 더 많아질 텐데 그때마다 나에게 이런 신체기관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될 것이라고 겁을 주셨다. 이런 말을 들어서인가 오늘따라 기력은 더 쇠한 것만 같고 거울에 비친 흰머리는 더 늘어난 것만 같다. 머리 사이사이 흰머리를 들춰보며 생각한다. 원래 이런 것인가. 인간의 삶이란 건 꽃피우는 시간은 잠깐이고 하나둘 잃어가는 시간은 오래인가.
잃어 간다는 것. 매번 경험하면서도 그깨마다 새롭고 적용되지 않는 이 사건들은 왜 이리도 삶의 후반부에 많이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을 계획한 그 최초의 의지는 도대체 우리가 상실 속에서 무엇을 배우기를 기대했기에 잃어가는 시간을 이리도 오래 준비해둔 것일까.
약속이라도 되어 있던 것처럼 하나둘 잃어갈 것이다. 젊음, 건강,활력, 감각, 기억, 가족, 침구, 배우자, 사랑하는 사람들, 움켜집었던 강물은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고 정성과 집착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은 바람에 야위어갈 것이다.
거울에 비친 흰머리를 들춰보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아 그 길고 적막한 시간을 상상한다. 세상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나는 그저 버려진 의자처럼 방치된 채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천천히 낡아가는 시간을. 그 평온하고 지루한 시간에 나는 더 이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추억의 조각들을 홀로 이어붙이며, 손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손대었던 것들에 대한 후회 속에서 침잠하고 있겠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할머니들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냄새를 맡아본다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혹시나 몸에서 냅새가 나서는 아닌지 확인해본다는 것이다. 모든 상실의 과정이 결국 나의 상실로 귀결된는 것이었다는 이 받아들이기 힘든 쓸쓸함. 한때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이었고 때로는 세상의 관심이 귀찮다고 느꼈었지만,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소모되어가는 우리를 그대로 방치할 것이다.
외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외할아버지는 독거노인이 되었다. 아흔이다 되셔서도 그 많은 자녀 각각의 번잡한 가정사 때문에 홀로 식사를 하고 잠자리를 챙기신다. 가끔 찾아뵐 때면 더 왜소해지셨다고만 생각할 뿐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인데, 언제나 티브이를 마주하고 앉아서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고 계신다. 체육 선생님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이제 보청기도 소용없을 만큼 들리지 않는 귀로 티브이 소리는 최대한 줄인 채, 종일 두꺼운 남자들이 서로를 들쳐 업고 내던지는 장면을 보고 계신 것이다.
물론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지만,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외할아버지는 정정하셨다. 발이라도 닿고 있어야 잠이 드신다던 그 고운 외할머니가 돌라가시기 3일 전에 외할아버지는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는 눈을 껌뻑껌뻑하며 우셨다. 군에서 겨우 휴가를 내어 도착했을 때, 외할머니의 모습은 낯설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팔다리는 너무나 말랐고, 복수가 찬 배는 이불을 덮어둔 상태에서도 눈에 띄게 솟아 있었다. 단 것이 드시고 싶다는 말에 자리를 지키던 친손녀는 초콜릿을 떼어 더 이상 이를 닦을 이유가 없는 입속으로 넣어 드렸다.
죽음이 하나의 지점이 아니라 과정임을 이해한 건 그때였다. 삶이 끝나고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길고도 지루한 시간 동안 삶 위로 죽음이 쌓이고 중첩되어 무르익어간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한 죽음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했던 말은 기억한다. 먼저 가 있을 테니 빨리 따라 오라는. 하지만 그 힘겨운 목소리를 겨우 들으면서도 외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나는 그때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십여 년에 지나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진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도저히 알 길이 없지만, 외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아셨던 것이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는 독거노인이 되었다. 두꺼운 남자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며 외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덤덤히 수용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물론 이것은 외할아버지에게 물을 수도 없는 문제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하다. 무엇이 외할아버지로 하여금 여기에 남아 있게 하는지. 무엇이 그 상상하기 어려운 길고도 외로운 시간을 반복하며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이 위태로운 생을 천천히 이어가게 하는지.
나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왔다. 밤이 되는 건 괜찮으나 날이 저무는 것은 아쉬울 뿐이라고.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시간이 쓸쓸할까 걱정될 뿐이라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날이 저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을지 모른다, 노을이 지는 것도, 움켜뒤었던 강물이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도, 정성과 집착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바람에 야위어가는 것도,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둘 잃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과정일지 모른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해하게 될, 그 어떤 약속에 대해서 나는 기대해보기로 했다.
저자의 말: 모든 관계는 내 안에서 별을 이룬다
타인--------------------------------------------------
별에 대하여
모든 지식은 언젠가 만난다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가
이별에 대하여
사랑은 떠나고 세계는 남는다
연애에 대하여
화장실 세면대를 붙잡고 울어본 적 있는가
흔적에 대하여
그에게는 오카리나가 남았다
소년병 이야기 1
- 맑은 겨울 아침, 그는 떠난다고 말했다
소년병 이야기 2
- 떠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소년병 이야기 3
- 다른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소년병 이야기 4
- 매듭을 이어 고리를 만들다
소년병 이야기 5
- 그들은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
세계--------------------------------------------------
인생에 대하여
여행할 시간 30년이 주어진다면
노력에 대하여
열심히 살아도 괜찮은가
개에 대하여
세상은 왜 새롭고 아름다운가
던져진 세계에 대하여
왜 나는 나에게 집착하는가
시간에 대하여
부재를 사는 사람 존재를 사는 사람
나의 이야기 1
- 현실에서 부유하는 사람들
나의 이야기 2
- 현실의 순례자들
나의 이야기 3
- 삶을 움켜쥐고 싶을 때 만다라를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 4
- 끝의 끝에는 시작이 있다
나의 이야기 5
- 우리는 떠날 때에야 비로소 정착한다
도구--------------------------------------------------
통증에 대하여
모든 관계는 통증이다
이야기에 대하여
세계와 나를 맺어주는 도구
믿음에 대하여
낡은 벤치를 지키는 두 명의 군인 이야기
진리에 대하여
진리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현실에 대하여
자본주의가 빼앗아가는 것들
언어에 대하여 1
- 언어의 두 가지 방향
언어에 대하여 2
- 시를 쓴다는 것
언어에 대하여 3
- 책을 읽는다는 것
언어에 대하여 4
- 타인의 말
언어에 대하여 5
- 내면의 말
의미--------------------------------------------------
꿈에 대하여
꿈이 삶을 가르친다
죽음에 대하여
상실과 소멸이 우리를 일으켜준다
노화에 대하여
죽음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환생에 대하여
팔라우의 해파리로 산다는 것
영원에 대하여
끝나지 않을 노래를 부른다는 것
결론을 항하여 1
-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결론을 항하여 2
- 나는 누구인가
결론을 항하여 3
- 세계란 무엇인가
결론을 항하여 4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결론을 항하여 5
- 자기 안에 우주를 담고 있는 수많은 존재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