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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by 하늘보기™ 2023. 9. 8.

저자 성석제 | 창비 | 2006.05.15

 

아주 특별하고 신화적이고 개성적이며 영웅적인 ‘벌거’

햄버거

미국은 패스트푸드의 천국이다. 또한 체인점의 나라다. 미국 음식 하면 맛이나 문화를 떠올리기보다는 손쉽고 싸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건 1995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뉴욕 외곽의 아파트에 사는 누이 집에 머물렀고 밖에 나가서도 술집 아니면 한식당에나 드나들었으므로 도대체 제대로 된 미국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연수를 와 있던 선배와 함께 워싱턴을 다녀오게 되었다. 갔다오는 길에 미국 동부 최대의 도박도시인 어틀랜틱 시티에 들러 미국 도박계를 평정 내지 박살내자는 기마 민족의 후예다운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출발한 길이었다. 워싱턴에서는 워싱턴 스퀘어며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노점에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호텔로 돌아와 맥주와 켄터키치킨을 먹으며 월드시리즈를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감했다. 다음날 오전에 전날과 비슷한 메뉴로 배를 채우고 드디어 애틀랜틱 시티(나는 발음하기가 힘들어 ‘거시기’ 또는 ‘고놈’이라고 부르는 ‘Atlantic City’를 영문과 출신이자 미국 연수 2년차인 그 선배는 ‘어를래닉시리’로, 혹은 두문자를 따서 ‘AC’로 불렀다)로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우리의 국도에 해당하는 길로 막 빠져나왔을 때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뭐 좀 특별한 음식이 없을까. 이 시골 아니면 못 먹는 그런 음식 말야. 매일 똑같은 체인점에서 남들하고 똑같은 음식 먹는 것도 좀 지겹네”라는 대화가 우리 둘 사이에 오갔다. 우리는 길가에 우리나라 국도 변의 가든처럼 흔한 몇몇 체인점을 그냥 지나쳤고 뭔가 특별한 게 나와주기를 기대하면서 30여분을 더 갔다. 가을이었고 세상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림같이 생긴 집들이 한두 채씩 띄엄띄엄 있는 것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남다른 음식점을 찾아내고 그 앞에 차를 세웠다. 버거킹도 맥도널드도 켄터키치킨도 아닌, 그 지역의 이름을 딴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안에 들어가자 촌스럽게 생긴 처녀 혼자서 우리를 맞이했다. 텔레비전을 보면 패스트푸드 체인과 함께 총의 천국이기도 한 이 나라에서, 처녀 혼자 장사를 하는 걸 보니 시골은 시골인 듯했다. 처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선배는 시간이 지났든가 이르든가 해서 주방 아줌마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 식으로 하면 가정식 백반 같은 건 먹을 수가 없고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간단한 음식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집의 음식은 체인점과는 뭔가 좀 다를 것 같았다. 메뉴는 아크릴판으로 계산대 위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 중에 상당히 특이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HICKE BURGER’가 그것이었다. 나는 그 특이함에 감동, 덮어놓고 그걸로 먹겠다고 선언했다.

뭔가 특별한 걸 먹자는 거듭된 내 주장에 선배 역시 그 발음하기 어려운 버거를 먹는 데 동의했다. 그의 발음관에 따르면 그건 ‘히키 버얼거’ 또는 ‘히케 벌거’였다. 나는 전문가인 그가 발음 연구를 계속하도록 놓아두고 그 처녀에게 흰 바탕에 검은 아크릴 글자가 붙여진 메뉴를 가리키며 ‘투’ 하고 손가락 두개를 내밀었다. 처녀는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웃으면서 가져가겠느냐, 여기서 먹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같은 손가락 중의 하나로 바깥을 가리켰다.

  랩으로 싼 두개의 특별한 ‘벌거’ 또는 ‘버얼거’, 청량음료 중간 컵 하나씩을 든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사방을 살피다가 아늑한 햇빛이 내리쬐는 건물 뒤편 잔디밭을 식사장소로 정했다. 소풍 온 기분으로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앉아 우리는 흔치 않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 처음 와본 시골에서나 맛볼 수 있는 맛이었다. 정감 있고 고유한 맛이 살아 있었으며 무엇보다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내 말에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렇게 맛있는 ‘벌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이 정도로 맛있는 걸 보면 ‘히케’는 코네티컷이나 시애틀처럼 미국 원주민 신화 또는 전설적인 영웅과 연관 있는 이름이 틀림없다. 가는 길에 정확한 발음을 물어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그 특별한 장소와 시간과 식사를 누리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처녀에게 그 ‘벌거’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그건 ‘히케’도 ‘하이키’도, 내 주장대로 H가 묵음이어서 ‘이케’인 것도 아닌, 치킨버거(CHICKEN BURGER)였다. 메뉴판이 오래되어 아크릴 글자 C와 N이 떨어져나간 것이었다. 처녀가 마구 웃는 이유를 이번에는 알 것 같았다.

 

1부

국화차는 없다
얌전한 맛
김밥의 귀족, 귀족의 김밥
프로페셔널 아마추어리즘
터미네이터
여우고개 너머 닭개장
이인분의 외로움
삶은 살, 살의 삶
요로콤 조로콤 혀쌓도
앞니 사이에 끼우고 조근조근 깨물면
일곱 켤레의 남정네 신발과 하나의 두루마리 화장지 미인
지상천국의 지하식당
니나노집의 얌전한 닭
술은 누가 따르는가
향을 먹는다는 것
호랑이가 모르는 사실
새벽의 맵고 아린 맛
연어, 영어 그리고 스포츠카
가재는 게 편이 아니었다
눈 내린 들판 환한 달빛처럼
아주 특별하고 신화적이고 개성적이며 영웅적인 ‘벌거’
서럽고 아련한 외로움
입속에 가득 차는 환희
껍디기로만 껍디기로만
원조의 품위

2부
꿩 대신 닭, 그러나 지존심이 고명처럼 살아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냉면
우리는 우리끼리
국수 살롱 싸롱 국시
가을날 마법의 길에서
자존심과 자부심
칼 같은 도리
소년시절의 맛
신선, 선녀를 만나다
바로 그 맛을 보았다
천국에는 사다리가 없다

3부
겨울 서리
시리디시린 기다림의 맛
삼천포가 있다
잘 익어야 맛있다
죽여주는 맛 살 맛
첫눈이 내린 뒤에
오리 머슴
쏘가리와 동무 생각
꿀 먹은 벙어리가 하지 못한 말
무서운 맛
어리석은 농부와 사과나무 용사들

4부
아지매집 아지매를 그리며
요런 깍쟁이들
하늘로 가는 뚜껑이 열린다
단순 직격의 생생함
도를 트게 해드립니다
야생의 맛
국화차는 있다
국화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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